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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군정

대차리

대차리(大車里)

대차리는 읍내리의 서쪽에 위치한 옛 주계고성지(朱溪古城址)인 성안에서부터 금강 천변까지 이어지는 곳으로 조선시대 서면소재지였던 대촌(大村)과 부내면에 속했던 차산(車山)마을이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합해진 법정리이다. 이에 따라 지명도 대촌의 ‘대(大)’와 차산의 ‘차(車)’자를 따서 대차리라 하였다.
그 후 대차1리와 대차2리로 나누고 차산(車山)마을은 차산(茶山)으로 개칭하면서 대차3리로 하였다. 그런데 1961년 대차1리와 2리를 합해 대차1리로 하고, 차산마을을 대차2리로 다시 조정하였다가 1972년 대차1리인 종전의 대차마을을 ‘서면’마을로 개칭하고, 대차2리는 옛 지명인 ‘차산’마을이라 하였다.
대차리는 동으로 성안에서 읍내리와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남대천을 사이에 두고 용포리와 인접하며, 서쪽과 북쪽은 금강을 경계로 충남 금산군과 도계를 이룬다.

서면(西面·大村)마을

대차리 서쪽 금강가에 자리한 강변마을로 옛적부터 ‘서호(西湖)’라 불리웠는데, 단일 마을로 인근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 하여 ‘대촌(大村)’이라 불리웠다. 본래 무주부 서면의 소재지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무주면에 편입되면서 종전 부내면의 차산과 함께 대차리에 편제되었다.
그 후 대차1리로 구획되었는데, 1972년 행정분리의 명칭을 자연마을 명칭으로 바꾸면서 서면이라 했다. 서면은 본래 무주부 시절 면의 명칭이고, 그 당시 서면의 소재지였다 하여 ‘서면’을 지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마을에는 옛적에 선비들이 소요하던 집승정(集勝亭), 돈세정(遁世亭), 비암정(秘巖亭) 등의 정각이 있고, 무주부에서 금산으로 가는 대로와 연결되는 소이진(召爾津) 나루가 있었으며, 나루에 따른 소이원(召爾院)이 있었고, 망풍루(望風樓) 등의 명소가 있었던 유서 깊은 고장이다.
일제 강점기 때 무주에서 금산으로 가는 신작로가 이 곳을 중심으로 개설되었는데, 용포교가 가설되기 전까지 버스를 배에 싣고 건넜다고 한다. 마을에는 1960년 설립된 무주초등학교 대차분교장이 동네 어귀를 지키고 있었는데, 현재는 폐교되었다.

차산(車山·차살·茶山·오리골)마을

조선시대에는 부내면에 속했던 마을로 본래 지명은 차산(車山)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서면의 대촌마을과 함께 무주면 대차리로 편제되었고, 그 후 지명을 차산(茶山)으로 바꾸고 대차3리라 하였다. 1961년 대차2리로 조정되었다가 1972년 다시 차산마을이 되었다.
백제 때부터 관아가 설치되었던 읍성(邑城)이 소재한 마을로, 조선 초기 주계성(朱溪城)이 존재하여 우리 고장을 지키는 보루(堡壘)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 인조 때의 명신 임담이 우거하며 분의정(分宜亭)을 짓고 말년을 보낸 곳인데,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무주에서 금산으로 가는 신작로를 내면서 옛주계성을 헐게 되어 귀중한 문화유산이 손실되고 말았다.

담당부서 :
무주읍 총무
연락처 :
063-320-5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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