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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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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천면 지명유래

설천면의 연혁

설천면의 시대별 연혁(沿革)을 살펴보면 삼한(三韓)시대에는 마한에 삼국시대에는 백제(百濟)의 적천현과 신라(新羅)의 무산현에 속하여 무주구천동 33경중 제1관문인 『라제통문』의 명칭이 삼국시대부터 유래되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는 단천현과 주계현으로 개칭된 후 조선 전기에는 무풍면과 주계현을 통합 풍서면으로 불리우다가 중기에는 현재 안성면인 횡천면과 신풍면(현재 : 두길, 심곡, 삼공)의 일부를 흡수하여 풍서면으로 개칭된 후 일제강점기인 1914년도 행정구역 개편 당시 풍서면과 횡천면 그리고 신풍면 3개면을 통합 『설천면(雪川面)』으로 개칭된 후 10개 법정 25개 행정분리로 편제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설천면 마을별 유래
가곡리(가곡 문암)

조선시대에는 현 무주읍의 장백(長白里) 설천면 기곡~진평까지 9개마을을 같은 행정구역으로 구획한 신풍면의 소재지였다. 지역에서는 가장 좋은 터라 하여“터일”이라 불리어오다가 조선후기 기산촌(基山村)이라 불렀다. 1914년 장백리를 제외한 종전의 신풍면 일원이 설천면으로 편제되었는데 그때 기곡은 “문바우”로 부르던 문암(門岩)마을과 함께 같은 현재의 I행정 구역인 기곡리로 편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북쪽으로 흘러오는 남대천이 마을 앞을 지나 서북쪽으로 곡류한 후 무주 방향으로 흘러가는 천변에 위치하고 있어 조선시대에는 제원찰방에 속하는 소천역과 연결되는 승장원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처음 들어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사람은 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삼암 박이겸으로 전해 오는데 현재 는 그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는 밀양박씨 동족마을이다. 마을 앞 남대천 건너 삼전산 남쪽에는 순조 12년(1812)에 건립된 박씨효열오정각이 있어 효열의 고장임을 알 수 있다.

동쪽 위치한 문필봉 계곡에는 옛적부터 문바우라 부르는 마을이 있고 마을입구에 마치 문같이 생긴 2개의 커다란 바위가 있어 하나는 붓같이 생겼고 다른 하나는 벼루를 닮아 문암(門岩)이라 하여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동으로는 길산리와 인접하고 남서쪽으로는 무주읍과 경계를 이루며 북쪽은 남대천 건너 삼전산 너머로 충북 영동군과 도계를 이루는 중요한 지역으로 1939년 설천공립심상소학교가 간이학교로 설립된 후 지금은 이농현상으로 인구가 줄어 폐교가 된 기곡국민학교가 1944년 설립됐던 곳으로 교육열이 높고 인간의 최대 덕목인 효를 실천하는 마을로 알려져 있다. 이마을에는 지금도 마을 한가운데 있는 두그루 느티나무 아래서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가 되면 후손들이 당제를 지내오고 있으며, 여름 휴가철이 되면 마을 앞 남대천변 천년된 소나무 아래 모래와 자갈이 어우러져 아담하게 자리잡은 강선대에 피서객이 몰려오고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길산리

신길 - 정착지, 하길산, 상길 - 신계, 지전 길산리 지역은 옛적부터 흙이 황토로 비가 오면 발이 빠져 농사일을 못할 정도로 질어서 “질번지” 또는 “길산”으로 불려오고 있다. 조선초에는 신풍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설천면으로 편제된 후 종전에까지 신촌에 속했던 질번지와 주막담 그리고 지전마을을 같은 행정구역으로 하여 길산리라 하고 법정리로 삼았다. 그때 질번지는 지금의 하길마을로 주막담은 상길마을로 개칭되어 지전마을과 함께 3개의 자연마을로 구획되었다. 그후 1972년 행정분리 명칭을 자연마을 단위로 바꾸게 되면서“길산”이라 했는 데 1981년 하길산과 정착지를 신길, 상길산과 지전을 합쳐 상길로 구획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고 이때부터 상길산은 신계라는 새로운 자연마을 지명으로 부르게 되었다.

길산이란 지명은 지역에 높은 산이 없고 야산과 들로만 이루어진 복 받은 땅이라 하여 붙여졌다 전해오고 있으며 동쪽은 무주읍과 청량리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적상면과 서쪽으로는 기곡리와 인접하는데 북쪽은 남대 천을 사이에 두고 충북영동군과 도계를 이루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신길마을에는 전국에서 1위를 차지한 포도가 유명한 농특산물로 재배되고 있으며 상길마을에는 남대천변 고목아래 수변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한여름 지역주민들의 천렵은 물론 휴가철 관광객이 가족과 함께 피서와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다양한 물고기 낚시와 다슬기채취 등 체험관광 코스로 추천을 할 만한 마을로 촌락의 담장이 전부 돌담길로 되어 있고 유산적 가치가 높아 2007년부터 원형복원사업이 추진되는 유래가 깊은 전형적인 농 촌마을로 마을회관 2개를 보유하고 있어 민박도 가능한 곳이다.

청량리

남청 - 비례, 하엽, 원청 - 무항, 원청, 진평 - 온평, 진평 청량리는 조선시대에 주계현과 무풍현의 경계를 이룬 곳이었다 하여 무주목이라 불려오다가 1914년 신풍면에 설천면 청량리로 편제되어 청량1리(현재의 진평, 개금벌)와 청량2리(청량, 하엽, 비례미)로 구획되었다가 1972년 청량1리를 진평, 청량2리를 청량리로 불러오다가 1981년 행정분리 명칭을 자연마을로 개칭하면서 원청량과 남청량으로 나뉘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청량마을의 유래는 마을의 뒷산인 청량산에 청량사라는 커다란 사찰이 있어 지명이 만들어 졌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구천동 덕유산과 무풍면의 대덕산에서 발원한 맑고 찬 냇물이 흘러 들어와 큰 강폭을 이루며 사람들의 마음까지 시원하게 씻어 준다 하여 청량리라 불리게 되었다는 다른 유래설도 있다. 언제 건축이 되었고 폐허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으나 마을 앞을 유유히 흐르는 남대천은 지명에서 유래된 근거라도 증명을 하듯 천연기념물 322호인 반딧불이와 그 먹이 다슬기서식지로 환경부로부터 지정되어 보호지역으로 보존되어 오다가 2001년 1월 상류지역 관광지와 덕유산리조트 운영 등으로 인한 수질오염으로 해지되었다.

청량리 지역은 최근 세계태권도원이 조성되는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고 농촌종합개발사업이 추진됨은 물론 반딧불테마공원 등 볼거리와 즐기거리가 즐비하고 특산물로는 포도와 복숭아가 많이 재배되고 있어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웰빙(Wel Being)관광인 농촌체험관광의 적지로 볏짚과 싸리나무 등 우리선조들이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소쿠리, 지게, 바지게, 둥구미 등 공예품제작 체험과 구매도 가능하다.

소천리

외양 - 양지, 재궁, 내양 - 양지, 학의재, 상평 - 평지, 나림, 하평 - 평지, 이남 - 이남, 신촌, 이미리 소천리는 5개 행정분리로 구성된 설천면의 소재지로 지명의 유래는 본래 지명은 삼촌(三村)으로 제원찰방에 속했던 소천역이 소재했던 곳이라 하여 현재의 소천(所川)이라 불리고 있으나 그러나 과거에는 하천의 물이 눈처럼 맑다하여 설천, 소천역 지명에서 유래된 역말이라 불려왔다고 회자되고 있으나 한편 덕유산에서 발원한 원당천과 대덕산의 남대천, 동북쪽의 삼도봉과 민주지산에서 흘러들어오는 곡류에 위치하는 냇가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하여 소천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도 한다.

외양마을은 양지말 중 바깥마을에 해당되는 지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1972년 양지로 불리어 오다가 1981년 내양지와 외양지로 분리된 후 지금에 이르고 있고 일제강점기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농협 등 주요 행정관서와 1922년 설립된 국민학교, 1938년 포교당으로 시작한 관음사 등이 자리잡고 있고, 소천역이 있던 이곳을 지나던 행인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던 “떡전거리” 지명이 지금도 불리 우고 있는 곳이다. 내양마을은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설계 박치원과 그 문중의 효자인 운곡, 박권, 운촌, 박삼 형제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설호사가 현존해 있어 사당은 철종11년 효를 기리고자 그 후손들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며 예전에는 내양지를 밭이 많은 지역이라 하여 다밭골이라 불렀고 뒷산너머 마을을 하그동이라 불렀다. 평지마을은 윗마을인 상평과 아랫마을인 하평으로 나누어진 마을로 과거 서민들의 애환과 영호남을 넘나들며 물물교환의 장이 되었던 설천시장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현대화된 건물로 현존하고 있고, 지명의 유래는 땅이 평평하다 하여 붙여졌다고 전해오며 나림마을은 본래 이토질 땅으로 진흙이 많은 곳이라 하여 라니라는 지명이 써오다가 언젠가 나림으로 변형되어 불려지고 있다. 하평마을에는 1953년 개교한 설천중학교가 지금은 설천중고등학교로 새롭게 출발하여 지역 인재육성의 산실로 자리메김하고 있으며, 세계태권도원조성사업 유치로 신도시개발계획에 따라 밝은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는 마을이다. 이남 마을은 라제통문이 있는 석견산을 중심으로 동서로 위치 크게 이남과 신촌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고, 마을 명칭의 유래는 설천에서 바라다 보면 저산너머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구천동 33경중 제1경인 라제통문 아래로 흐르는 원당천이 잠시 머물며 소를이루고 있는 곳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 양국 군사들이 전쟁을 하면서 싸우다죽은 시체들이 쌓여 파리들이 들끓었던 곳이라 하여 파리소라고 불리 우고 있는데 조선 영조 대 효자 이만경이 추운 겨울철에 물고기를 구하고자 애를 태우고 있을 때 얼었던 냇물의 얼음이 깨지면서 잉어가 튀어나와 병고에 고생하는 부모님에게 달여 먹여 효를 다하게 하였다 라는 전설이 유래되어 빙어약소라는 지명의 전설이 전해 내려 오는 곳이다.

대불리

외북 - 외북, 내북 - 내북, 불대, 중현 대불리는 설천면의 최북단 해발 1,242m의 민주지산을 사이에 두고 충북과 도계를 이루는 곳에 위치한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풍서면에 속했는데, 1914 년 설천면 대불리로 편제되어 대불1리(외북)와 대불2리(내북, 불대)로 구획 되었다가 1972년 자연마을단위로 행정리가 분리되면서 대불1리가 외북으로 대불2리가 내북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의 명칭은 옛날부터 불교와 관계되는 불대, 불당골, 중현 등과 같은 지명이 전해오고 있으며, 계곡 어디인가 알 수 없는 땅속에서 묻혀있는 부처 님이 땅위로 나올 때는 극락정토가 이루어 진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고, 현 재 중현마을에는 대종교가 자리하고 있고, 마을 뒷산 석기봉 정상 암벽에는 커다란 불상이 새겨져 있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외북마을은 설천의 북쪽에 있는 곳이라 하여 북동 또는 북리로 부르던 마 을인데 후에 내북동과 분리되면서 지금의 외북마을로 불리게 되었으며, 마을 동쪽은 미천리, 남쪽은 장덕리와 경계를 이루고 서북쪽으로는 내북마을과 인접하는데 이 곳에는 1949년 설천초등학교 분교장으로 설립되었다가 1958 년 대미초등학교로 승격하였다가 1988년 또 다시 분교장이 위치했던 마을 로 지금은 폐교가 되었으나 지금도 폐허가 된 건물과 잡초가 무성한 운동장터가 남아 있고 사유화 되어있다.

내북마을 불대와 불당골은 옛날 큰 사찰이 있었던 곳이라 전해오는데 마을 서쪽 계곡의 불당골에는 지금도 절터로 보이는 건물지의 기단석과 주초석이 남아있고 탑신, 옥개석,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어 불교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안골짜기 중고개(중현) 정상에는 어느 시대것 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삼두 형상을 하고 있는 마애불상이 석기봉 석벽에 새겨져 있다. 마을 뒷산인 민주지산은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축으로 충청북도와 전라북도를 나누는 분기점으로 높은 봉우리와 계곡이 형성되어 곳곳에 아름다운 담과 소를 만들어 서쪽으로 흐르다 미천리에서 흘러오는 미대천에 유입된 후 설천소재지 상평마을 앞 남대천에 합류한다.

미천리

미천 - 장자동, 중미, 하미 미천리는 설천면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상북도, 전라북도, 충청북도 3개도를 접경하는 삼도봉이 소재하는 곳으로 삼도봉은 고종33년(1896) 전 국의 8도를 13도로 개편할 때 충북 영동군, 경북 금릉군(현 김천시), 전북 무주군이 경계를 이루게 된 역사가 있는 곳이다. 이 지역은 옛날부터 피난지로 명성이 높아 국난이 있을 때마다 많은 사람 들이 들어와 정착하면서 동네를 이루었던 곳으로 지금도 정착지 마을터가 자리 잡고 있으며, 산림이 울창하고 흐르는 계곡물이 너무나도 맑고 아름다 워 미래라고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아름다운 내가 흐르는 곳이라 하여 미내 즉 미천이라 개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의 지형이 마치 미륵의 형상을 닮아 언젠가는 미륵이 올 땅이 라고 하여 지명이 붙여지게 되었다는 설이 있고, 마을 뒷골짜기에는 보사골 이라는 곳이 있고 석기봉 아래 깊은 계곡에 위치한 안골, 지금은 하미로 불 리우는 아랫미래, 중미로 불리우는 웃미래 등 불교용어가 남아있고, 아랫미 래 남쪽에는 장자터로 불리우던 장자동이 있고 무풍면으로 넘어가는 고갯길밑에 자리 잡았다 하여 잿말이라 부르던 점말이 지금도 현존하고 있다. 해발 1,176m의 삼도봉에서는 매년 10월10일 3개도 자치단체장이 한자리에 모여 동서화합분위기 조성을 위한 삼도봉행사가 펼쳐지는 곳으로 지금은 매년 수백명의 등반객이 즐겨 찾는 명산으로 자리 메김하고 있는 곳이다.

장덕리

장덕 - 수한, 장평 장덕리는 설천면과 무풍면의 면계를 이루며,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 통일신라 이후에는 주계현과 무풍현의 경계를 이루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풍서면에 속했는데 1914년 설천면에 속하면서 장덕리라 칭하 게되었고 지명의 유래는 진들이라 부르는 장평마을의 장자와 엣 지명이었던 덕골의 덕자를 따서 붙여 시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장덕리의 수한마을은 본래 마을건너 물찬이(물차니)라는 계곡에 위치하여 부르던 마을인데 후에 개울 건너 양지편으로 이주하여 양지담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한 때는 이 곳에 큰 계곡이 위치한다고 하여 덕골이라 했는데 행정 구역 개편당시 옛 지명인 수한으로 바뀌게 되었다. 장평마을은 들이 길쭉하게 생겼다하여 진들이라 부르다가 후에 장평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며 우리지역 특산물인 포도를 관내에서 처음 들여와 전체농가가 재배를 할 정도로 단지화된 지역으로 유명하며 지역농가 주소득 작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남쪽으로는 무풍면과 면계를 이루고 서쪽은 소천리, 북쪽은 미천리와 대불 리가 인접한 마을로 옛부터 효열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고, 지금도 수한 마을 국도변에는 효자 남양제갈공근환지비와 학생경주최씨공영익배유인진양하씨 효열비가 있고, 찬물이 흐르던 물찬이 계곡은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어 문화관광부로부터 2005년 청정환경 지표곤충인 반딧불이 보호지역으로 지 정 받아 깨끗한 환경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마을이다.

두길리

신두 - 신동, 양지담, 정착지, 하두 - 하두, 구산 - 구산, 벌한, 방재, 월현 - 월현, 와석, 마전 두길리는 본래 구천동 심곡과 삼공리 그리고 무풍면 삼거리, 덕지리와 함께 금산군 횡천소에 속했는데 1674년 무주가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무주부로 편입되었다가 그 뒤 1914년 설천면 두길리로 편제되었는데 그때 두길리는 두길1리(상두, 하두)와 두길2리(벌한, 구산, 와석) 두길3리(월현, 마전)로 구획되었다. 그 후 1972년 두길1리는 하두로, 두길2리의 벌한,구산, 방재는 구산으로 두길3리는 월현과 마전 2리에 속했던 와석을 합하여 월현으로 개칭되었다.

그런데 1981년 하두마을 중 개울건너에 있는 신동, 정착촌, 양지담을 합하 여 신두마을로 분리시킴으로서 두길리에 속한 행정 분리는 4개마을로 형성 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두길리라는 지명은 동쪽 거칠봉에서 라제통문이 있는 석견산에 이르기까지 북으로 뻗어 내린 능선과 서쪽의 성지산에서 백운산을 거쳐 뻗어내린 능선 이 마치 곡식을 담는 거대한 말(斗)과 같이 생긴 형국의 길한 땅이라 하여 붙여졌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덕유산 국립공원 관문으로 구천동에서 내려오 는 맑고 찬물이 관류하고 있어 아름다운 경승을 이루고 있는데 제1경인 라 제통문을 비롯한 은구암, 청금대, 일사대, 함벽소 등 10개소나 되는 명소가 절경을 이루고 있는 지역으로 동으로는 무풍면과 면계를 이루고 남쪽 거칠봉에서 심곡리와 인접하며 서쪽은 적상면과 북으로는 청량, 소천, 장덕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신두마을은 무주구천동 제1경인 라제통문이 위치한 마을로 자연마을은 신동 양지담, 정착지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금은 폐원이 되었지만 1979 년 설립되어 지역주민에게 의료수혜를 제공하였던 대우병원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고, 하두마을은 신두마을과 함께 구천동 관문을 지키던 마을로 1981년 신두와 분리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고, 벌한, 방재, 구산 3개 자연마을로 형성된 구산리 지명은 구천동에서 흘러내리는 원당천이 마을을 휘감아 돌아 나가면서 마치 거북과 같다 하여 옛날부 터 불려져 왔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개울가에는 천상의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고 올라갔다는 강선대와 은구암이 자리하고, 동남쪽에 위치한 벌한 마을에는 신라 때의 화랑 4명이 소요했던 곳으로 알려진 사선암이 있고, 겨울철의 강한 서북풍이 불어오는 추운 곳임에도 이를 이겨내면서 살고 있는 지역이라 하여 벌한이라는 지명이 붙여졌다 전해오고 있고, 구산과 벌한 사이에 방재마을은 본래 무풍면을 넘나들던 고개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전해지고 있음 그리고 구산리에 있는 거칠봉은 일곱 신선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알려져 있으며 동쪽의 청룡한은 벌한마을 왼편에 위치하여 좌청룡에 해당하는 뜻이라고 전해지는 유명한 여름 피서지 이다.

월현은 본래 다르재라 부르던 월현과 눈들이라고 부르던 와석 삼바실로 불려오던 마전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달이 넘어 가는 고개(월현) 누워 있는 돌(와석), 삼농사를 많이 짓던 밭이 있던 곳(마전) 등 지명의 유래 있고 수성대라 부르는 일사대가 유명한데 구천동계곡을 흘러 내려온 원당천이 이 곳 암벽을 휘어 감고 돌아 나가 마치 물로서 성을 이루는 곳이라 하여 붙여 진 지명이라 전해지고 있고, 구한말 애국지사였던 연재 송병선이 관련되어져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선비들은 송병선의 인물 됨됨이가 동방에서 제일가는 선비라 칭하며 동방일사라는 호를 붙여 이것에서 유래됐다고 하는 전설도 있는 곳이다. 그리고 뜸북재는 구천동에 있는 구천명의 승려들이 밥을 짓기 위해 씻던 쌀뜸물이 이곳까지 왔다 하여 뜸물재에서 변형되 붙여진 지명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심곡리

심곡 - 원심곡, 대평, 배방 - 외배방, 내배방, 관서 - 관동, 만선, 등방 심곡리는 설천면에서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금 산군 횡천소에서 무주도호부 힝천면으로 이어져 오다가 1914년 설천면 심 곡리로 편제되었고, 후에 심곡1리(원심곡, 큰번덕)외 심곡2리(배방이)로 구획되었고 1972년 심곡1리를 원심곡으로 하고 심곡2리를 배방으로 하였는데 1981년 배방마을에 포함되어 있던 관동, 만선, 등방을 한 마을로 묶어 관서라는 새로운 행정분리를 3개마을로 구성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곳에는 구천동 33경중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파회, 수심대, 세심대 등 명소가 즐비하고 특히, 옛 등반 땅의 만선동에 설치된 구제규모의 스키장은 매년 150만이상 내방객이 찾는 4계절 전천후 휴양레져시설이 확충되어 있어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동쪽으로는 삼공리와 인접하고 남쪽은 향적봉을 사이에 두고 안성면과 면계를 이루며 서쪽으로는 치마재 너머로 적상면과 면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마전재에서 두길리와 인접한다. 원심곡은 임진왜란 때 피난 온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인데 동네어귀 개울가에는 그때 들어 온 사람들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심었다는 400년 넘은 음나무가 있었다. 둘레가 3m가 넘어 천연기념물로 관리되오던 이 나무는 원인 모를 이유로 죽게되어 해지되었는데 최근에 바로 그 옆에서 새로운 가지가 돋아 나고 있어 매년 정초 마을 사람들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고 동제를 지내고 있다. 대평마을 어귀의 송림 속에는 마치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는 거대한 암석 하나가 마을을 바라보면서 웅크리고 있는데 옛날 마을에는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 일이 많아서 전해 내려올 정도로 숲이 울창하고 계곡이 깊은 곳으로 이와 관련하여 어머니의 애절한 사연이 담긴 매산바위가 범바위 모퉁이 산 등성이에서 마을을 지키고 있으며 지명의 유래는 깊은 산골 마을 앞 들과 (새들) 뒤 들(큰평전)에 큰 전답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구전되고 있다.

배방마을에는 옛날 무주와 안성장을 넘나들던 치마재가 있어 과거 고달프게 살아왔던 애환이 서려있는 곳으로 행인을 위한 주막이 있었다고 하여 주막 담이라 부르는 행길가 계곡에 세심대가 있고 구천동으로 오르는 길가 계곡 옆에는 지금은 도로확포장공사로 인해 사라진 소머리고개가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고 이고개가 소재가 되어 서민들에게 불려지던 무주구천동 노래의 가사가 만들어진 계기가 되기도 한 곳이다. 관서마을은 옛날 안성면을 오가던 검령으로 올라가는 높은 지대에 위치한 동네라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등방이라 불려오다 행정구역 개편 때 개칭되고 만선동은 덕유산 정상에서 북으로 흘러내린 능선을 타고 내려오다가 고원을 이루는 곳에 위치한 마을로 형상이 마치 신선이 웅거하고 있는 것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은 현대인들의 신선놀음으로도 볼수 있는 스키장과 골프장이 만들어져 지명의 유래가 현실화된 곳으로 1990년 스키장 개장 이후 무주군에서 가장 급속하게 발전한 마을로도 유명하다.

심곡리는 그 외에도 무주구천동 아름다운 절경을 못잊어 흐르는 물도 돌아 서 간다는 파회 그 옆에 신라 대 일지대사가 이 곳을 구경하고 가던 길에 소나무 가지 하나를 꺽어 바위 위에 꽂아 놓은 것이 오늘까지 살아 있다고 전해오는 천송암이 있고 바로 그 위로는 절벽산이 물 위에 떠 있는 병풍처럼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것이 마치 금강산과 같은 절경을 이루고 있다고 하여 일명 소금강산이라 부르는 수심대 등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절경들이 즐비한 곳이기도 하다.

삼공리

보안 - 보안, 삼공 - 원삼공, 덕유 - 월곡, 인월담 삼공리는 설천면 최남단에 위치하여 경남과 도계를 이루는데 본래 구천동 이라는 지명으로 더욱 유명한 곳이다. 지명 유래는 구체적으로 전해 지는 바 없으나 동남쪽 삼봉산에서 발원하는 원당천 계곡과 서남쪽 덕유산 향적봉에서 발원하는 구천동천이 합류하여 배방마을 쪽으로 흘러 나가면서 땅이 똑 같이 세 곳으로 형성된다 하여 삼공이란 지명이 붙여진 것으로 유추할 수 있으나, 한편 곰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곰살미라고 불려 졌다고도 전해온다.

조선시대 금산군 횡천소에서 1674년 무주도호부 횡천면으로 편제되어 중 심부 역할을 했던 곳으로 현재의 무풍면 삼오정과 덕지리 일대, 북으로는 라 제통문까지 방대한 면적이었다고 한다. 그 후 1914년 설천면 삼공리로 편제 되었는데 당시에는 삼공과 당골(현 월곡)뿐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08년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공포된 삼림법에 따라 총독부관할이 되었고 1912년부터 1945년8월15일 해방될 때가지 일본 북해도 제국대 학의 연습림으로 사용되는 비운을 겪은 마을 이기도 하다. 1960년 구천동이 관광지로 개발되고 1975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급격한 성장을 보여 인구증가에 따라 1981년 삼공리는 원삼공과 보안마을 로 나뉘게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후 1986년 군조례 개정으로 원삼공마을에 속했던 관광단지를 덕유라는 지명을 붙여 현재 3개의 행정 분리로 구성 되었다.

옛날 불교 전성기 때에는 이 골짜기에 무려 14개의 절이 있었고 불도를 닦 는 성공불자가 구천명이나 되어 구천둔이라 부르다가 그 이후 구천동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보안마을 지명 유래는 마을 건너편에 있는 들의 농사를 위해서 막은 보 안 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보안이라 했는데 1981년 군조례 개정때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보안(洑內)이 보안(保安)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는 옛 날부터 향교골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넘어가는 고개마루에 천연기념물인 반송이 위치하고 있어 구천동을 상징하는 나무라 하여 구천송이라 불리기도 한다. 마을에는 1934년 설천공립보통학교 부설 심곡 간이학교(현 원삼공)로 개설하였다가 1939년 국민학교로 승격된 구천초등학교가 지금도 현존하고 있고 그 옆 길가에는 구한말 일본과 싸우다가 잡혀 옥고를 치르다 숨진 의 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순국비가 건립되어 있는 교육열과 애국정신이 투철했 던 마을로 잘 알려져 있다.

삼공마을은 구천동으로 더욱 알려진 마을로 맑은 물이 거울처럼 맑다 하여 수경대라고 이름 붙여진 관광명소가 있고 1963년 설치되었다가 1988년도 폐지(당시 현 보안마을로 이전)된 설천면 구천출장소와 보건진료소가 있던 마을로 지금은 농업이 아닌 관광소득을 주소득원으로 하는 상가와 유흥시설 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지역으로 변모하였다. 덕유마을은 본래 삼공리 중에서 당골이라 부르던 월곡마을과 함께 취락이 형성된 곳이나 1975년 국립공원으로 승격 후 관광단지를 조성하면서 새롭 게 형성된 집단시설지구로 과거에는 현재 구천동 상수도가 있던 곳에 인월 담이라는 지명이 있던 곳에 상가지역이 조성되었다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오 게 된 것으로 이 곳에는 지금도 백련사와 인월사 등 주요사찰이 자리잡고 있어 옛날 불교가 성행했던 지역이었음을 반증하고 있고, 1,614m의 덕유산 향적봉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주목군총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매년 300여만명의 외래 관광객이 꾸준이 찾아오는 남부 유일의 스키장과 연결된 덕유정상의 곤도라에서 바라본 겨울 설경은 왜 이곳이 설천이라는 지명을 지니게 되었는지 한치의 의심도 하지 못하도록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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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행정과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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