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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남면

부남면 지명유래

대문바위와 이무기

부남면 소재지인 대소마을에서 장안리 안전 방향으로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옥녀봉 산줄기와 금강(錦江)이 만나는 곳이 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푸른 강물이 활처럼 휘어 굽이치며 흐르는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 산허리와 도로를 사이에 두고 푸른 강물에 뿌리를 박은 채 웅장하면서도 기묘하게 생긴 바위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다. 그 바위 꼭대기에는 대여섯 그루의 노송과 노간주나무가 마치 분재를 가꾸어 놓은 듯 아담하면서도 당찬 모습으로 오랜 풍상을 겪으며 서 있는데 이 소나무를 천년송(天年松)이라 부른다.

지금은 옥녀봉 줄기와 이 바위 사이로 이차선 도로가 훤히 뚫려 있지만 수십 년 전 까지 만해도 산지락과 바위사이로 겨우 한두 사람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골목길 같은 협곡이었다.
이곳은 이웃마을과의 경계로 마을 출입구 역할을 했던 곳이다. 이웃마을에 돌림병이 돌거나 마을에 위험한 일이 발생했을 때는 가장 먼저 이곳을 막아 행인들을 통제했다한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이곳을 마을의 대문으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대문 구실을 하는 이 바위를 대문바위라 부르게 된 것이다.

어느 해 여름, 대소마을에 사는 머슴총각이 큰 황소를 대문바위 옆에 매어 놓고 풀을 뜯도록 하고서는 더위를 식히려고 강물로 뛰어 들었다. 그런데 강물에서 시원하게 멱을 감고 황소를 매어놓은 대문바위로 온 머슴총각은 하늘이 노오래졌다. 그도 그럴 것이 대문바위에 매어 놓았던 황소가 오간데 없어 진 것이다. 허둥지둥 황소를 찾던 총각은 대문바위 뒤쪽에서 소의 시체를 찾긴 했으나 그것도 소의 몸통은 흔적도 없고 머리만이 피투성인채 뒹굴고 있었다. 너무도 놀랍고 이상한 일이라 마을사람들이 모두 나서 대문바위 근처를 샅샅이 뒤지다 보니 바위 밑 물 속에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

황소는 이무기의 밥이 되었던 것이다. 이 후부터 마을사람들은 대문바위 근처엔 소를 매지 않았고 할일 없이 그곳에 머무르는 일도 삼갔다. 또한 날씨가 추워지면 대문바위 근처에는 마치 산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아 연기가 나는 것처럼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무기가 산 쪽으로 뚫려 있는 굴속에서 뿜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한 때는 이 김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온천이 있는 것이 아닌가 했지만 조사 결과 아닌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이곳에는 겨울이 되면 땅속에서 김이 올라오는데 마을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이무기가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대소마을과 불
  • 부남면 소재지인 대소마을은 예부터 인심 좋고, 경치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거기에 병풍 같은 바위가 마을 뒤에서 안온하게 감싸주고 있어 살기 좋은 마을이다. 또한 옥녀봉 줄기가 뻗어 내려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뛰어난 자연 경관으로 마을의 입지조건은 참으로 좋은 곳이다.

    그러나 이토록 평화롭던 마을에 뜻하지 않게 이유 모를 불이 일어나 온 마을이 불타버리니 큰 재앙을 맞은 것이다.
    어렵게 복구를 하면 또 불이 나고 다시 불이 나 일년여 간격을 두고 세 차례난 마을이 불에 타버리니 마을 사람들은 생활 터전을 잃고 점차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봉길마을의 각시바위

아주 오래 전에 대유리(大柳理) 봉길(鳳吉) 마을에는 아름다운 모습과 고운 마음씨를 가진 예쁜 각시가 있었다. 그녀는 이웃마을에서 이 마을로 갓 시집 온 새댁이었다. 홀로된 시어머니와 남편을 위해 부지런히 일하며 마을사람 모두에게 상냥하게 대하니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칭찬했다. 그러나 각시에게는 시집 온 그날부터 시어머니의 호된 시집살이로 하루도 편하고 조용한 날이 없었다. 각시의 시어머니는 청상과부로 겨우 유복자 아들 하나를 얻어 오직 아들만을 의지하고 살아와 괴팍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나이가 차자 장가를 보내 며느리를 맞고 보니 유일하게 기대어 살아 온 아들을 며느리에게 빼앗긴 것 같은 질투심에 며느리를 더욱 구박하고 학대했다. 그럼에도 각시 부부는 금실이 좋았다. 남편은 부인을 ‘각시야 각시야' 부르며 다정하게 대했으며 부부간은 더없이 부러울 것 없을 만큼 행복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아들이 며느리를 각시라고 부르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부부의 다정한 모습만 보면 더욱 며느리를 괴롭히며 공연한 트집을 잡고는 했다. 그러나 워낙 성품이 착한 며느리는 모진 학대를 참으며 정성껏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순종하고 살았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정안수를 더 놓고 천지신명께 시어머니의 만수무강과 집안의 평안을 비는 치성을 올렸다. 새댁이 시집온 지 삼년이 지났다. 그런데 대를 이을 자식이 없자 시어머니의 구박은 더욱 심해졌고 자식을 낳지 못하는 새댁의 고민은 더 할것 없이 큰 것이었다. “여자가 시집을 와서 그 집안의 대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한는 것은 철거지악(七去之惡) 중의 으뜸이니 차라리 어디로 나가 죽어 없어지거라. 네년이 우리 집안의 대를 끊어 놓을 작정이냐 네가 없어져야 새 며느리가 들어올게 아니냐!” 시어머니의 열화같은 성화에 새댁은 죽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어찌할 수 없는 가슴앓이로 괴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각시는 죽을 결심을 했다.
자신이 죽어야만 새며느리가 들어와 집안의 대를 이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단단히 죽을 각오를 한 각시는 강 건너 바위로 올라갔다. 바위 위에서 뛰어내릴 작정을 한 각시는 마지막으로 바위에 끓어 앉아 천지신명께 자신의 부덕(不悳)함을 용서빌고 집안에 대를 이어 줄 여인이 어서 빨리 들어오기를 간절히 빌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보이지 않자 그래도 은근히 걱정스러워 밖으로 찾아 나섰다. 시어머니는 강 건너 벼랑 위에서 기도하는 며느리를 발견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며느리가 있는 벼랑 근처에 하얀 구름이 몰려오더니 며느리는 바위와 함께 구름에 가린 채 하늘을 향해 천천히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아가! 아니 아가!” 놀란 시어머니가 큰소리로 호들갑스레 며느리를 부르자 솟아오르던 바위덩이는 멈추어 굳어 버리고 며느리는 벼랑에서 떨어져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던 바위는 그대로 굳어져 버렸는데 그 모습은 마치 여인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형상과 같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恨) 많은 각시가 자신의 생을 마친 곳이라 하여 각시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봉길마을의 매산(梅山)바위

대유리 봉길 마을에는 지금부터 약 200년 전쯤에 매산 이라는 어린 딸을 데리고 혼자 힘들게 살아가던 젊은 과부가 있었다. 외모가 뛰어나서 뭇 남정네의 유혹과 재혼을 하여 팔자를 고치라는 권유도 많이 받았지만 매산 이만 바라보며 꿋꿋하게 혼자 살아보려 애를 썼다. 끼니를 이어가기 어려운 궁핍한 생활이라 마을에서 품을 팔아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워낙 여유가 없는 마을인데다 가뭄이 겹쳐 계속된 흉작으로 모두가 생활에 쪼들려 봉길에서는 품을 팔아줄 형편인 가정이 없어졌다.

살아갈 방도를 찾아 매산이 어머니는 강 건너 대소마을로 일거리를 찾아 가야만 했다.
대소마을은 봉길 마을 보다는 형편이 나아 몇 몇 부잣집을 돌아다니며 일품을 팔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최부자댁 주인 영감이 매산이 어머니를 보고 반하여 매일 일감을 주며 드나들게 하였다.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야 돌아오는 어머니를 기다리는 매산 이는 매일 강가의 바위에 앉아 어머니가 오기를 기다리곤 했다. 안방마님이 오래 전부터 병석에 누워 있자 참한 여인을 찾아 후실로 들일 생각을 하고 있던 최부자는 때 마침 매산이 어머니를 보고는 그녀를 후실로 들여앉힐 생각으로 끊임없이 호의를 베풀며 그녀의 환심을 사고 드디어 자신의 집으로 들어와 살 것을 제안했다.

외로움과 고달픔을 견뎌내며 힘겹게 살아가던 매산이 어머니는 며칠 동안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고심하다가 마침내 부자 영감의 제안을 승낙했다. 강 건너 최부자 집으로 들어앉을 결심을 굳힌 어머니를 눈물을 머금고 매산 에게 일렀다. “매산아, 날씨가 몹시 추우니 강가에 나와서 기다리지 말아라. 난 오늘 늦을지도 모르니까. 며칠 있다가 좋은 옷을 한 벌 지어 줄 테니 내 말대로 밤에 마중 나오지 말고 집에 있거라” 저녁이 되자 매산 이는 강 건너 마을로 일을 간 어머니가 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근심이 되어 강가로 마중을 나갔다. 어머니가 마중을 나오지 말라고 했지만 어머니를 기다리는 매산 이의 마음이 방안에 가만히 앉아 기다리게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를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길이 없는 매산 이는 추위와 허기를 참으며 이제나 저제나 하고 어머니를 기다렸다.
강바람은 살을 에이듯 차가왔고 허기에 지친 매산 이는 그만 강가 바위 위에 스러져 잠이 든후 영여 깨어나지 못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매산이 어머니는 강가로 달려와 매산 이를 부르며 울부짖으니 그 울부짖음이 메아리 되어 온 마을을 울렸다. 어머니는 매산 이가 생전에 바위 위에 앉아 기다리던 모습을 생각하며 강 건너 바위를 향해 “매산아!” 하고 외쳤다. 그러자 강 건너에서 “매산아!” 하고 어머니의 울부짖음이 메아리 되어 돌아왔다. 그 뒤로 마을사람들은 매산 이가 어머니를 기다리다가 죽은 바위를 매산 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매산(梅山) 바위에는 언제부터인가 매화(梅花) 나무 한그루가 자라나 이른 봄이 돌아오면 매화꽃 한 송이가 곱게 피어 지나는 길손들을 손짓한다.

효녀와 상사바위

아주 오랜 옛날 대등(大登, 지금의 한티마을) 마을에 마음씨 착하고 인정 많은 문씨(文氏)와 지씨(池氏)가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더 사이좋게 살았는데 이들의 우정은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할 정도였다. 이들 두 사람에게는 각각 자식이 있었는데 문씨는 아들 하나만 두었고 지씨는 딸 하나만을 슬하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자식들이 어릴 때부터 서로 사돈을 맺기로 굳은 언약을 한 터이었다.

집안 어른들이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는 처지라는 자연 두 집안에는 왕래가 잦았고 자식들도 오누이처럼 다정하게 정을 주고 받았다.
이제 두 아이가 자라 어엿하고 어여쁜 처녀 총각이 되자 양가의 어른들은 은근히 혼인 날짜를 잡는 눈치였고 처녀 총각도 어서 그날이 오기를 마음속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병중인 부친 생각에 포기하지 않고 눈보라 속에서 얼음을 깨고 낚시를 드리운 채 수삼일 을 꼼짝도 않고 기다리니 추위 속에 며칠간을 굶어 그만 스러져 버리고 말았다. 정신을 잃고 스러진 공은 생사를 넘나드는 꿈을 꾸었다. 공이 깊은 물속을 헤엄쳐 다니다 별천지와 같은 수중 궁궐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들어가니 궁궐 식구들이 모두 반기며 함께 살기를 종용했다.
그곳은 만난 음식과 편안함이 가득한 풍요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늙으신 부모님을 생각하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 부모께 효를 다해야 한다며 그곳의 권유를 뿌리치니 공의 효성이 갸륵하게 여긴 용왕이 타고 나가라며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선물로 주어 그 잉어를 타고 물 속을 가르며 육지로 나오려다 꿈을 깼었다. 공이 꿈에서 깨는 순간 얼음이 소리를 내며 갈라지며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툭튀어 나오니 공은 깜작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 암에 보이는 커다란 잉어는 바로 꿈속에서 용왕에게 선물로 받았던 그 잉어였다 것이다.
감사함과 반가움으로 얼른 잉어를 집으로 가져가 병중의 부친에게 봉양하니 잉어를 드신 부친은 그날로 쾌차하여 병석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의 간절한 효심과 정성이 하늘도 감동을 한 것이었다. 도한 추운 겨울에 모친이 수박을 먹고 싶다고 하자 애를 태우며 여기저기 구하러 다니던 중 어느 날 밤 꿈의 현몽(現夢)에 따라 외양간에서 수박을 구해 모친의 소원을 풀어 주었다는 효자이다. 고종 9년(1872) 「孝子 學生恩津宋桂元之閭」라고 명정(銘旌)되어 그해 정려각(旌閭閣)을 세웠다.

송 계원(宋桂元)의 효행

효자 송계원(宋桂元)은 영 정조(英 正朝) 시대의 인물로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공(公)은 본래 덕망과 인품이 뛰어난 인물로 모든 이에게 존경 받는 사람이었다. 늙으신 부모님 봉양과 후학에 힘쓰기 위해 부남면 굴암리 상굴암 마을에 터를 잡고 공은 부모에 대한 효심이 극진하여 병중이던 부친이 한겨울에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자 그길로 잉어를 구하러 나서 모진 고생 끝에 잉어를 구해 와서 모든 사람을 감탄하게 했다.

공이 잉어를 잡으러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에 나갔을 때는 추운 날씨에 꽁꽁 얼어붙은 강에서 잉어를 잡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병중인 부친 생각에 포기하지 않고 눈보라 속에서 얼음을 깨고 낚시를 드리운 채 수삼일 을 꼼짝도 않고 기다리니 추위 속에 며칠간을 굶어 그만 스러져 버리고 말았다. 정신을 잃고 스러진 공은 생사를 넘나드는 꿈을 꾸었다. 공이 깊은 물속을 헤엄쳐 다니다 별천지와 같은 수중 궁궐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들어가니 궁궐 식구들이 모두 반기며 함께 살기를 종용했다.
그곳은 만난 음식과 편안함이 가득한 풍요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늙으신 부모님을 생각하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 부모께 효를 다해야 한다며 그곳의 권유를 뿌리치니 공의 효성이 갸륵하게 여긴 용왕이 타고 나가라며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선물로 주어 그 잉어를 타고 물 속을 가르며 육지로 나오려다 꿈을 깼었다. 공이 꿈에서 깨는 순간 얼음이 소리를 내며 갈라지며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툭튀어 나오니 공은 깜작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 암에 보이는 커다란 잉어는 바로 꿈속에서 용왕에게 선물로 받았던 그 잉어였다 것이다. 감사함과 반가움으로 얼른 잉어를 집으로 가져가 병중의 부친에게 봉양하니 잉어를 드신 부친은 그날로 쾌차하여 병석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의 간절한 효심과 정성이 하늘도 감동을 한 것이었다. 도한 추운 겨울에 모친이 수박을 먹고 싶다고 하자 애를 태우며 여기저기 구하러 다니던 중 어느 날 밤 꿈의 현몽(現夢)에 따라 외양간에서 수박을 구해 모친의 소원을 풀어 주었다는 효자이다. 고종 9년(1872) 「孝子 學生恩津宋桂元之閭」라고 명정(銘旌)되어 그해 정려각(旌閭閣)을 세웠다.

황 효자(黃孝子)와 비조(飛鳥)

이 이야기는 부남면 장안리 식암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다.
옛날, 이 마을에 집안은 가난하였으나 성품이 어질고 부모에 대한 효행이 극진한 황시화(黃時和)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워낙 착하고 부지런한 그는 어디서든 사랑 받고 칭송을 받았다. 맛있는 음식이나 귀한 물건을 보면 먼저 부모님 생각을 하고 어찌해서든 마련하여 부모님께 해드리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의 집일을 도와주고 받은 품삯으로 무엇을 사서 부모님께 드려 기쁨을 드리나 하고 고심 끝에 부모님들이 좋아하시는 고기를 사다 드리려 마음을 먹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기 음식을 장만해 드리는 것은 평소에 생각도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사는 마을에는 고기를 파는 육고간이 없고 멀리 떨어진 금산이나 무주 같은 큰 마을로 가야만 했다.
마침 그 날이 금산의 장날이라 아침 일찍 서둘러 60리 길인 장으로 가서 쇠고기 한 근을 사가지고 돌아오고 있었다. 점심도 거른 채 걸음을 재촉하여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대치재에 이르는 순간 갑자기 큰 새가 나타나 황 효자에게 달려들어 들고 있던 고기뭉치를 가로채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한시 바삐 돌아가 고기로 저녁상을 봐드리려 했던 황효자는 이 같은 어이없는 상황에 그만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주저 않아 멍하니 어두워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한참만 에 정신을 차리고 허탈한 마음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당도한 것은 밤이 이슥해서였다.

벌서 잠자리에 드셔야할 부모님께서는 두 분이 도란도란 얘기를 주고받고 계셨다. 아들이 당도한 것을 안 어머니가 반갑게 맞으시면서 말하기를, “애야, 일찍 돌아왔으면 저녁을 먹고 마실 을 갈 것이지 이 시간까지도 배도 고프지 않느냐” 하시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말씀이 너무 뜻밖이라 미처 대답도 못한 채 방으로 들어선 황효자는 밥상을 보고 깜짝 놀라, “어머니, 이 쇠고기 국이 어디서 난 것입니까” 라고 묻자, “네가 아까 저녁 무렵에 사다 놓고 마실 갔다 온거 아니냐 애야, 이 귀한 고기를 사왔으면 잘 갖다 놓고 가야지 하마터면 그놈의 큰 새가 물고 갈 뻔 했구나. 무슨 새가 그리도 큰지,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아니” 라고 애기 하시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황효자는, “아하 ! 내가 늦게 도착할 것을 알고 그 새가 고기를 물어다 부모님께 미리 가져다가 그린 게로구나.” 하며 자신을 도와준 하늘에 감사드리며 눈시울을 적셨다. 효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하여 돕는다는 교훈을 일깨우는 이야기로 황효자의 극진한 효행을 말해주는 것이다. 후세의 사람들이 황효자의 효행을 칭송하여 식암마을 클 길가에 효행 비를 세워주었다고 한다.

감악바위와 남선굴

고려 말엽에 충신인 남선 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지혜와 학문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충절이 굳고 불의에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고려왕조가 점차 쇠퇴하여 붕괴되고 이성계가 조선이라는 국호로 새 황조를 이룩하면서 새 국가 건설에 고려의 유신들을 참여 시키고자 회유했다.
그러나 남선은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 이라며 모든 관직을 버리고 이곳 부남으로 내려와 피신을 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마음을 바꿔 새 왕조를 섬기면 높은 벼슬에 오를 수도 있엇지만 모든 권세와 영예를 버리고 오직 절개를 지키기 위해 지금의 부남면 대유리 한티마을 앞 감악바위 밑에 굴을 파고 은둔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이태조는 남선의 충절을 높이 사, 몇 차례에 걸쳐 사람을 보내 남선이 다시 한양으로 올 것을 청했으나 끝내 거절하고 세상을 멀리한 채 굴속에서 살다 죽었다. 남선의 죽음을 두고 어떤 이는 남선이 이태조의 강한 회유를 견디다 못해 감악바위에서 투신하여 죽었다고도 하고 굴에서 단식을 해서 죽었닥도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어쨌든 남선은 후세 사람들에게 충절의 높은 기개를 일깨웠으며 후세 사람들은 그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그 바위 위에 수절사라는 글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비석은 없고 그 흔적만이 남아 있으며, 남선이 기거했다는 감악바위 밑의 굴을 남선굴이라 부르고 있다. 현재 감악바위는 땅 위에 보이는 육지 감악바위와 물속에 잠겨 있는 수중 감악바위가 있는데 본래는 모두 육지에 있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고 지각 변동에 의해 바위의 일부가 물에 잠긴 것이다. 수중 감악바위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물길이 통과했다고 하나 지금은 워낙 물살이 거세어 볼 수가 없다. 자연 경관이 수려하여 특히 여름철에는 많은 사람들이 휴양처로 삼고 몰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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