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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군정

읍내리

읍내리(邑內里)

현재 무주군의 소재지로 백제 때부터 치소(治所)가 설치된 무주군의 행정중심지이다. 읍내리와 대차리의 경계를 이루는 성안은 본래 백제 때부터 관아(官衙)가 설치된 곳으로 오랜 세월 행정중심지 역할을 해 왔다.
성안의 읍성은 고려 때의 지명인 주계를 붙여 주계성(朱溪城)이라 불렀는데, 조선시대 무주현이 된 후 현재의 군청 자리인 읍내리로 관아가 옮겨졌으며, 이후 무주도호부로 승격되었을 때에도 부사(府使)가 머물던 유서 깊은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부내면 읍내로 불렸으며, 1914년 당시 부내면을 무주면으로 고치고 북리(北里)·상리(上里)·중리(中里)·하리(下里)로 병합하여 읍내리라는 명칭을 붙여 법정리로 하였다. 그 뒤 읍내1리,26) 읍내2리,27) 읍내3리,28) 읍내4리,29) 읍내5리,30) 읍내6리31) 등 6개 행정분리로 편제되었다.
1961년 다시 옛적의 읍내1리에서 4리까지 4개 행정분리로 조정되었다가 1972년 8개 행정분리32)로 나뉘었는데, 1990년 다양리에서 한수리(寒水里)가 분리되어 9개 행정분리가 되었다.
동쪽은 향로산에서 남으로 뻗어 내린 능선을 따라 오산리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동쪽에서 읍내리 앞을 지나 서쪽으로 흐르는 남대천을 사이에 두고 당산리와 경계를 이룬다. 서쪽은 옛 주계읍성인 성안을 경계로 대차리와 인접하고, 북쪽은 진산(鎭山)인 향로산 너머 금강을 따라 내도리와 경계를 이룬다.
종전 상리. 종전 상리 일부. 종전 북리와 중리 일부. 종전 북리 일부. 중전 중리 일부. 종전 하리.
사정(射亭), 교동(校洞), 다양(多陽), 향산(香山), 운교(雲橋), 남천(南川), 죽산(竹山), 대교(大橋).

사정(射亭)마을

읍내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하며, 옛적에는 동구(洞口)에 서낭당이 있었고, 마을 가운데 행길 가에 서낭신을 모신 큰 정자나무가 서 있다. 읍내에서 가장 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웃말’ 또는 ‘상리(上里)’로 통하며,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이 무예를 닦던 활터, 즉 ‘사정(射亭)’ 혹은 ‘사청(射廳)’이 있던 곳이라 하여 ‘새청거리’로 불리었다. 이런 연유로 1972년 사정마을이라 하였다. 마을에는 옛적부터 그릇을 굽던 옹기굴(옹기가마)과 기와를 굽던 기와굴(기와가마)이 있었으며,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칠리대(七里台)가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 때 설치된 영림서(營林署) 무주출장소를 비롯하여 1962년 설립되어 1973년 이 곳으로 이전해 온 무주군 산림조합(茂朱郡山林組合)이 있고, 당산리로 가는 무주대교(茂朱大橋)가 남대천 위에 놓여 있다.

교동(校洞)마을

본래 웃말, 즉 상리(上里)에 속했던 마을인데, 1972년 행정분리 시행 때 교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교동은 마을에 향교(鄕校)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무주향교는 본래 무주부 관아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호환(虎患)이 심하여 지금의 한수리(寒水里)로 옮겼다. 그런데 이 곳의 땅이 너무나 습하다하여 현재의 장소로 옮기게 되었다. 그 후 1909년 무주향교에 사립(私立) 무주명륜학교(茂朱明倫學校)가 설립되어 오늘날 무주초등학교 전신(前身)이 되었다.
현재 마을에는 무주향교 이외에 1946년 설립된 무주중학교가 위치해 있고, 농산물검사소(農産物檢査所)와 농수산통계사무소(農水産統計事務所), 무주상수도사업소 정수장, 반딧불 아파트가 소재하며, 1938년 개설된 한전출장소가 있었으나 이전하고 없다. 읍내리 가장 위쪽에 있는 마을로 상동니(우마을·上里)가 있다.

신교(新校)마을

본래 교동에 속했던 마을인데, 2006년 행정분리 시행 때 교동에서 분리하여 새로운 교동, 즉 신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무주읍 교동리를 “교동리”와 “신교리로 분리하고, 개정(분리)전 교동리 11개반을 기존의 교동리에 6개반, 분리되는 신교리(新校里)에 6개반을 두도록 함에 따라 1개반이 증가했으며, 교동리 반딧불 아파트 입주 등에 따라 행정능률과 주민편의를 위하여 행정리 및 반을 증설하게 되었다.

한수(寒水)마을

본래 읍내 북동리(北洞里)인 다양마을에 속했는데 인구의 증가에 따라 1990년 분리되었다. 찬물이 많이 나오는 곳이라 하여 한수골(寒水谷)로 불린 까닭에 ‘한수’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마을 뒷산 향로산에는 조선시대 설치된 봉화대(烽火台)터가 있고, 골짜기에는 성황신(城隍神)을 모셨던 성황묘(城隍廟)가 있었다. 또한 가뭄과 질병 등의 재앙이 있을 때마다 성황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여제단(羈祭壇)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여제단 자리에 신사(神社)를 세우고 일본 황실의 조상에게 참배를 강요하던 굴욕의 현장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초기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이 고장의 지세(地勢)를 보고 난 후 북쪽이 허(虛)하다고 하여 탑(塔)을 세우고 절을 짓게 하여 건립되었다는 북고사(北固寺)가 있으며, 1692년 이건 되어 1834년까지 존속된 무주향교가 있었던 곳이다.
옛 향교 터에는 1981년 새로 건립된 무주고등학교가 있고, 옆에는 1967년 건립된 무주중앙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다. 옛 여제단 앞에는 1909년 무주향교의 명륜학교를 전신으로 설립된 무주초등학교가 있고, 그 옆에는 1988년에 세워진 무주 공공도서관이 위치하고 있어 교육의 요람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 외 1985년 건립되어 지역의 의료사업을 도맡아 했던 무주군 보건소(茂朱郡保健所)가 2002년 당산리로 이전한 후 무주군 사회단체들이 입주하였다.

다양(多陽)마을

햇빛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이라는 의미를 갖는데, 본래 읍내리의 북리에 해당하였으나 1972년 다양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마을은 향로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서쪽으로 뻗어내린 언덕에 위치하며 무주 시가지가 강(江)이었던 옛적에는 낚시를 드리웠다는 ‘바우백이’ 등의 지명이 전해오고 있다. 1990년 본래 마을에 속해 있던 한수골이 한수(寒水)라는 지명으로 분리되었다
다양에는 무주읍사무소(茂朱邑事務所)를 비롯하여 1916년 개설된 등기소(登記所), 1922년 설립된 엽연초생산조합(葉煙草生産組合) 등을 비롯하여 1957년 건립된 무주천주교회(茂朱天主敎會), 1972년 옮겨 온 무주군교육청(茂朱郡敎育廳) 등의 주요 기관이 소재하고 있으며, 한전 아파트 등이 있다.

향산(香山)마을

본래 동네 중간에서 앞섬으로 가는 길에 재가 있어 ‘잿말[북동니·북리:골안(고을 안) 북쪽에 있는 마을로 절이 있었는데, 불에 타고 재만 남았다고 함]’로 통하던 마을인데, 1972년 향산마을로 지명을 붙였다. 옛적에는 북리 일부와 하리 일부에 속하였다. 향산이라는 지명은 읍내리의 진산(鎭山)인 향로산(香爐山)의 맥을 따라 서남으로 흘러내린 언덕에 자리하고 있으며, 향산사(香山寺)라는 절이 소재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는 1918년 포교당(布敎堂)으로 시작된 향산사가 있으며, 일제 강점기 때부터 신앙의 뿌리를 내린 무주읍교회(長老敎), 한국전쟁 이후 전파된 통일교회(統一敎會)가 위치하고 있으며, 1921년 연초원(煙草院) 무주영업소(茂朱營業所)로 개설된 이후 1931년 연초판매소, 1946년 무주전매서(茂朱專賣署) 등으로 개칭되었다가 1989년 명칭이 바뀐 한국담배인삼공사가 오랜 세월 마을을 지키고 있다.

운교(雲橋)마을

읍내리 중앙에 위치하며 옛적의 중리(中里)에 해당된다. 운교라는 지명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남대천을 건너던 남교(南橋)가 있던 자리 근처에, 일제 강점기 때 동서를 관통하는 신작로가 개설되었다. 그 당시 마을로 흐르던 개울에 콘크리트 다리를 가설했는데 사람들은 ‘구름다리’라 부르고, 구름다리에서 남대천으로 나가는 골목을 ‘구름다리 고삿’이라 불렀다. 이런 연유로 구름 ‘운(雲)’자와 다리 ‘교(橋)’자를 붙여 운교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한 때는 상리와 하리 사이에 있다고 하여 중동니(중리)라 하였다.
마을이 읍내의 한 복판에 위치한 관계로 군청(郡廳), 우체국(郵遞局), 농협(農協) 등 주요기관이 자리잡고 있으며, 한국전쟁 당시 불타 버린 무주면사무소 자리가 있었고, 한국전쟁 이전에는 무주장터의 장옥(場屋)이 늘어서 있었다. 무주장터는 1919년 3·1만세운동 때 독립만세를 외치던 역사의 현장이다. 현재 무주군청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공터는 객사(客舍)가 있던 곳으로 무주경찰서가 위치해 있었다.

남천(南川)마을

남천은 읍내 앞을 흐르는 남대천변에 위치한 마을로, 옛적에는 남리를 비룻한 중리 일부와 북리 일부에 해당하는 마을이었다. 그리고 남대천변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해서 남천마을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남천마을에는 관아였던 동헌(東軒) 앞에 한풍루(寒風樓)가 있었고, 그 아래에 환수정(喚睡亭)이 위치하고 있어 풍류를 즐기던 율객(律客)과 묵객(墨客)들이 자주 오르던 명소였는데 언제인지 모르게 훼철(毁撤)되었고, 한풍루는 남대천 건너편에 복원되었다. 현재는 국민건강보험공단 무주지사, 무주농협지소, 무주새마을금고 등이 위치하고 있다.

죽산(竹山)마을

본래 아랫말의 뒷동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로 종전에는 ‘잿말’(향산리)과 같은 동네에 속했던 마을이다. 본래 대나무가 많았던 동산이었다 하여 1972년 죽산(竹山)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마을에는 옛날 대나무 밭에서 억울하게 죽은 어느 여인의 한을 풀어주었다는 무주부사와 얽힌 전설이 있고, 천재지변이 있을 때마다 제(祭)를 올리던 사직묘(社稷廟)가 있었으며, 1971년 설립된 KBS방송 중계소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이 고장에 전기를 공급해 주던 한전무주변전소 등이 위치한다.

대교(大橋)마을

읍내리에 있는 마을 중 가장 아래에 위치하고 있어 ‘아랫말’ 또는 ‘하리(下里)’로 불렸다. 마을에는 조선시대부터 ‘적천(남대천)’을 건너던 ‘대천교(大川橋)’가 가설되었는데, 일제 식민지 때 신작로를 개설하면서 대천교 위에 콘크리트 교량을 가설하고 ‘무주교(茂朱橋)’라 하였다. 지역민들은 이 다리를 ‘공굴다리’ 또는 ‘큰 다리’로 불렀다. 이런 연유로 1972년 지명을 대교라 하게 되었다.
현재 마을에는 인접 시·군과 교역을 이루는 5일장(五日場·市場)이 운영되고 있는데, ‘무주장터’는 한국전쟁 이후 운교마을에서 이설 된 것으로, 2002년 시장 현대화 사업에 따라 현대식으로 확장하고 이름도 ‘반딧불 장터’로 바꾸었다.
이 곳은 조선시대 군사들의 사열과 훈련을 받던 ‘장대(將台)’ 즉 ‘열무대(閱武台)’가 위치했던 곳이라 전해지고 있는데, 상록 아파트 등 주거 지역의 역할도 크다. 읍내리에서 맨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하동니(하리)라 하였다.

담당부서 :
무주읍 총무
연락처 :
063-320-5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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